하얀 목련 필 때 생각나는 사람

사는 이야기

하얀 목련 필 때 생각나는 사람

energypark 2022. 4. 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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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련이 필 때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20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두 분을 최근 5년 사이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만추의 낙엽이 소슬히 거리에 쌓여갈 무렵부터 급격히 병세가 위독해지셨습니다.

리고 두 분 다 투병으로 매섭고 혹독한 겨울을 지난 다음해  4월,  하얀 목련과 함께 하늘나라로 떠나신 겁니다.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렸습니다. 5년전 4월의 일이죠. 80대 후반의 연세에도 평소 너무도 건강하고 정정하셨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폐암과 각종 노인성 질환 등으로 몸이 매우 쇠약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연식이 30년이나 지난 애마(?) 스텔라 승용차에 어머니를 태우고 병원에 다니셨죠. 그리고 매일 손을 꼭 잡고 산책도 하시고, 가끔은 드라이브도 하시고 맛집에도 함께 다니셨습니다. 동네에서 소문난 잉꼬부부(?) 셨죠.

그런 아버지께서 갑자기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수술 후 투병하시다가 불과 4개월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저와 아내는 그토록 정정하셨던 아버지의 별세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무엇보다 당장 몸이 쇠약한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큰 일이 되었습니다.

 저와 아내, 그리고 누나가 번갈아가면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주중에는 아내와 누나가,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는 제가 어머니 집에 거하면서 모셨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가 잠시 부주의하게 방치한 사이에 어머니가 홀로 걸어가시다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꼬꾸라지는 사고가 터졌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던 몸상태에 고관절이 완전히 골절되었습니다. 수술 후 2년 이상 재활훈련을 했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스스로 거동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설상가상 여러 가지 질환들이 더욱 악화되었고 치매 증상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의 상황은 글로써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크나 큰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죠. 

결국은 집에서는 도저히 돌봐 드릴수 없는 상황이 되어 요양병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11월 말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거의 매일 회사 퇴근 후 어머니 문병을 하고 집에 가면 늦은 밤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도 되돌아보면 그 시기가 몸은 매우 피곤했지만 병실에서 어머니와  단둘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를 보시고 어린아이처럼 반가이 손을 흔들며 좋아하셨습니다. 

두 달 정도 지났을까. 재작년 2월 초 정도로 기억됩니다. 여느 날과 같이 저녁에 병원 면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병원 측으로부터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이제 보호자 면회가 중단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이 마지막 면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의식이 희미하고 정신도 오락가락하신 상태인지라 코로나 상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날이 보호자 면회가 마지막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아시는 듯 저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오늘은 제발 가지 말고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을 하시는 듯 말이죠.

저는 차마 내일부턴 뵙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어머니 손을 잡고 마냥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너무 늦어져서 집으로 가야 했기에 어머니 손을 놓고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발걸음을 옮겨 병실 문을 나서는데 다시 왈칵 눈물이 제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것이 이 생에서의 어머니와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계속 보호자 면회가 통제되었습니다. 전화로 병원 측에 어머니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답답했습니다. 밤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뵈면 좋겠는데, 자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불면의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4월의 어느 날 밤 2시쯤.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임종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보호자는 빨리 병원으로 달려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제 아내와 정신없이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의 얼굴은 이미 창백히 굳어 가고 있었습니다. 잠시후 담당 의사가 저에게 어머니의 임종을 알렸고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장례식도 코로나 상황인지라 가족장으로 조촐히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목련과 벛꽃이 만개한 동작동 현충원의 충혼당에 국가유공자이신 아버지가 누워계신 옆으로 고이 안장해 드렸습니다.

사실 부모님은 저에게 금전적인 유산을 거의 남겨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랜 기간 군생활을 하신 아버지의 연금으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뒤늦게 친구분과 사업을 하시다가 보증에 잘못 연결되어 거의 전 재산을 날리셨기 때문이죠.

그러나 저에게는 지난 20년간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들이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저 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살아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푸근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일들을 가능토록 해 준 사람은 바로 제 아내입니다. 그저 너무도 감사할 따름이죠. 장남도 아닌 저와 결혼해서 부모님을 곁에서 나름대로 정성껏 모실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고생도 참 많이 했죠. 이렇듯 고마운 아내에게 저는 별로 해준 게 없어서 그저 미안한 마음만 날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습니다.

생전에 부모님은 제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과한 욕심을 버리고 하루하루의 일에 자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거라」.

그렇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직까지 온 세상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만들어낸 괴물이 아닌가요? 

인간이 무한의 탐욕을 좇아 삶의 생태계를 파괴해 나간 결과, 부메랑이 되어 찾아와 우리에게 엄청난 불편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가 가장 힘드실때에 끝까지 곁에서 지키지 못하고, 상도 제대로 치뤄드리지 못한 것이 제 마음 속 깊이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코로나 이전의 세계는 잊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참으로 암울한 지적이지만 동의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시대에 어머니를 보내드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 속에 세간의 욕망만을 추구하며 집착하듯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말이죠. 

앞으로는  회광반조하듯 마음을 돌이켜  탐욕에 찌든 생각과 생활패턴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공부를 해보려 합니다.  

좀더 너그럽고 성숙하게 사람과 자연에 어울려 더불어 사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한편으론 집착은 버리되 더욱 열정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년 봄에는 코로나 없는 세상에서 하얀 목련을 바라보며 부모님과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추억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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